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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보는 세상] 視聽과 見聞 [중앙일보]

입력시각 : 2010-04-19 오전 12:05:00

보고 듣는 행위를 한자로 적으면 시청(視聽)과 견문(見聞)이다. 보는 동작은 시견(視見), 듣는 행위는 청문(聽聞)이다.

‘시견’의 두 글자는 그 새김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쓰임새는 다소 다르다. 앞의 글자는 일차적 행동, 뒤의 글자는 그 동작의 결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볼 시(視)는 눈의 감각이 사물에 닿는 행위다. 그에 비해 견(見)은 그에 따른 결과, 말하자면 눈으로 본 현상과 사물이 머리로 인식되는 과정에 이름을 말한다. 그래서 나온 성어가 시이불견(視而不見)이다. 사물을 눈으로 보되 그 자체에서 그치는 상태다. 생각이 따라주질 않으니 보지 않은 것과 같은 셈이다.

다음은 ‘청문’이다. 마찬가지다. 듣되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이 청이불문(聽而不聞)이다. 뭔가를 들었으면서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머리로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 불러 놓고 정치적 제스처로 한껏 상대의 기운만 빼앗는 한국 국회의 청문회(聽聞會)가 바로 ‘청이불문’의 꼴이라고나 할까.

시조(視朝)와 청정(聽政)은 그래서 임금이 조정에서 정무를 보고 듣는 행위를 일컫는다. 관리가 업무에 임하는 것은 시사(視事), 판결을 주재하는 것은 청송(聽訟)이다.

이에 비해 한 걸음 더 깊은 뜻으로 전진하는 것이 견과 문이다. 두 글자를 합한 견문은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관찰로 얻어진 이해다. 그래서 ‘이 사람은 견문이 많다’는 식으로 말한다. 견해(見解)와 견식(見識)도 비슷한 용례다. 잘 듣고 보면서 사물과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면 ‘총명(聰明)’이다. 귀 밝은 게 총, 눈이 예리하면 명이다. 그런 사람을 ‘총민(聰敏)하다’거나 ‘명민(明敏)하다’는 식으로 적는 이유다.

요즘 우리가 보고 듣는 게 많다. 슬픔으로 돌아온 천안함 용사들을 맞으면서 말이다. 그 사후(事後)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사고의 전 과정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많기 때문이다.

적의 도발 여부, 국가 안보가 걸려 있는 국방태세에 대한 문제들이다. 적의 도발이 맞다면 북한의 정체를 똑바로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이로써 국방태세를 다시 튼튼히 구축한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보고 들었다가 그냥 잊을 사안이 아니다. 모두 뇌리 속에 깊이 새겨야 할 일들이다.

유광종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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